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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실적"이라는 뉴스에 흥분해서 AI 관련주를 추격 매수했다가, 정작 주가가 오르기는커녕 며칠 뒤 오히려 밀려버리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EPS(주당순이익)가 예상치를 크게 상회했다는 뉴스만 보고 "이건 확실하다"고 판단했는데, 시장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실적 시즌이 꼭 그 꼴입니다. 숫자는 좋은데 주가는 미지근합니다. 이 괴리가 단순한 시장의 변덕일까요, 아니면 숫자 안에 숨겨진 함정이 있는 걸까요.
좋은 숫자인데 왜 주가는 안 움직일까 — 이익의 질 문제
현재 S&P 500 기업들의 EPS 상회 비율은 88%, 이익 서프라이즈 폭은 5.2%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숫자만 보면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매출 상회 비율은 오히려 80%에서 76%로 줄었습니다. 이 간극이 문제의 출발점입니다.
이익이 늘었는데 매출은 별로라면, 그 이익은 어디서 왔을까요. 대부분은 비용 절감입니다. 지금처럼 비용을 쥐어짜서 이익을 늘리는 구조는 한두 분기는 버텨도 지속 가능성에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게 가장 껄끄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하나 나옵니다. 기업들이 실적 발표 때 쓰는 'Non-GAAP 조정 EPS'입니다. 여기서 Non-GAAP이란 일반회계기준(GAAP)에서 구조조정 비용, 주식 보상(스톡옵션) 비용 등 일회성 항목을 빼고 계산한 '조정 이익'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기업이 "이런 비용은 특이 사항이니 빼고 봐주세요"라고 직접 정의한 숫자입니다.
문제는 이 조정이 해마다 반복되는 일회성 비용을 계속 걷어내면서 이익을 실제보다 더 좋아 보이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GAAP 기준 PER(주가수익비율)이 29배인데 Non-GAAP 기준으로는 22배로 줄어들 만큼 차이가 큽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시장이 고평가인지 아닌지 판단 자체가 달라지는 겁니다.
- EPS 상회 비율 88% vs. 매출 상회 비율 76% — 이익의 출처가 매출 성장이 아닌 비용 절감
- Non-GAAP 기준 PER 22배 vs. GAAP 기준 PER 29배 — 기준 하나로 고평가·저평가 판단이 갈림
- 이익 가이던스 상향 조정 비율 둔화 — 이익 피크 우려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
감가상각 조작과 평가 이익 — 빅테크 이익 버블의 속살
AI 투자 열풍 속에서 빅테크 기업들이 GPU, 서버 같은 고정자산을 엄청난 속도로 사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산의 감가상각(Depreciation) 방식이 슬그머니 바뀌고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여기서 감가상각이란 자산의 구입 비용을 사용 기간에 걸쳐 나눠서 비용으로 처리하는 회계 방식입니다. 내용연수를 길게 잡을수록 매년 비용으로 인식하는 금액이 줄어듭니다.
메타가 GPU 서버 등 고정자산의 내용연수를 늘려 감가상각비를 낮추는 방식으로 이익을 부풀리고 있다는 비판이 마이클 버리, 짐 채노스 같은 공매도 투자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저도 이 부분을 처음 접했을 때 "그냥 회계 얘기겠지" 싶었는데, 실제 이익 숫자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는 CAPEX(자본 지출) 항목을 따로 챙겨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CAPEX란 기업이 미래 성장을 위해 설비, 장비 등에 투자하는 지출로, 이 금액이 클수록 향후 감가상각비도 함께 불어납니다.
더 교묘한 건 'AI 지분 평가 이익'입니다. 알파벳이 앤스로픽에, 아마존이 다른 비상장 AI 스타트업에 투자해두면 그 지분의 시장 평가액이 오를 때마다 이익에 잡힙니다. 매그니피센트 7 기업들의 비상장 투자 평가 이익 합산이 작년 1분기 100억 달러에서 올해 1분기 360억 달러로 껑충 뛰었다는 수치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현금이 들어온 것도 아니고, 언제든 반대로 평가 손실로 돌변할 수 있는 숫자가 이익에 버젓이 반영되고 있는 겁니다. 과거 닷컴 버블 때와 구조적으로 비슷한 냄새가 납니다.
JP모건과 골드만삭스도 AI·빅테크 실적 분석 시 본업 영업이익, 현금흐름, 감가상각, 주식 보상 비용을 따로 확인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출처: JP모건 인사이트).
밸류에이션을 짓누르는 고금리 — 매크로가 마이크로를 이기는 구조
기업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주가가 안 오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금리입니다. 주가는 기업의 미래 이익을 '현재 가치'로 환산한 값인데, 이때 적용되는 할인율(Discount Rate)이 높아질수록 그 현재 가치는 줄어듭니다. 여기서 할인율이란 미래의 돈이 지금 얼마만큼의 가치를 갖느냐를 결정하는 비율로, 금리가 오르면 할인율도 같이 올라 미래 이익의 현재 가치가 낮아집니다.
골드만삭스는 현재 금리와 달러 강세를 이끄는 요인으로 네 가지를 꼽습니다. 미국-이란 지정학적 리스크로 인한 유가 상승, 서비스 물가를 중심으로 한 인플레이션 재확산, 영국·일본 등의 정부 부채 증가로 인한 달러 상대 강세, 그리고 AI가 이끄는 미국 경제의 독주로 인한 '미국 예외주의' 강화가 그것입니다(출처: 골드만삭스 인사이트).
특히 서비스 물가 인플레이션은 경제 전반으로 퍼지는 성질이 있어 연준(Fed)의 금리 인하 결정을 계속 늦추는 요인이 됩니다. 골드만삭스 근원 PCE 분석에서 상승률 3% 이상 품목 비중이 여전히 높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여기서 근원 PCE(Core PCE)란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개인 소비 지출 물가지수로, 연준이 인플레이션 판단의 핵심 기준으로 삼는 지표입니다.
제가 직접 관련 분기 보고서를 뜯어보면서 느낀 건, 이익이 10% 늘어도 금리 상승으로 PER 멀티플이 10% 쪼그라들면 주가는 제자리라는 단순한 산수가 실전에서 얼마나 무겁게 작동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Higher for longer', 즉 금리가 예상보다 오랫동안 높은 수준에 머무는 시나리오는 이제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현금 흐름이 전부다 — 옥석 가리기의 기준
그렇다면 지금 같은 환경에서 어디에 집중해야 할까요. 저는 이 질문을 꽤 오래 붙들고 있었습니다. 결국 답은 하나로 좁혀졌습니다. 현금을 실제로 벌어들이고 있는가,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영업 현금 흐름(Operating Cash Flow)입니다. 회계 이익은 앞서 살펴봤듯 감가상각 조정, Non-GAAP 처리, 평가 이익 등으로 얼마든지 포장이 가능하지만, 영업 현금 흐름은 실제로 사업에서 현금이 얼마나 들어오고 나갔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훨씬 솔직한 숫자입니다.
고금리 시대에는 자본 비용이 비싸집니다. AI 투자를 대규모로 집행하는 기업이라면 그 투자가 실제로 수익으로, 다시 현금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숫자로 증명해야 합니다. AI 간판만 달면 올랐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냉정하게 분기 보고서를 읽어야 보이는 부분입니다.
RBC 캐피탈은 S&P 500의 강세를 전망하면서도, 현재 26~28배 수준의 PER 멀티플이 1년 뒤 24배 수준으로 내려올 것으로 예상합니다. 밸류에이션 확장이 아닌, 이익 증가의 힘으로 멀티플 축소를 버텨내는 구조입니다. 이 말은 곧, 진짜로 이익을 성장시키는 기업만이 주가를 지켜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AI라는 테마가 워낙 강력하다 보니 조금만 관련 있어도 오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 시장은 그 꼼꼼함의 수준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스톡 보상 비용(주식 보상 비용)도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식 보상 비용이란 임직원에게 스톡옵션이나 자사주를 주는 방식으로 지급하는 보수로, Non-GAAP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지만 실질적으로 기존 주주의 지분을 희석시키는 비용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EPS가 예상치를 웃돌았는데 왜 주가가 빠지나요?
A. EPS 상회 자체가 주가 상승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높은 기대치가 주가에 선반영되어 있을 경우 '예상보다 좋음'만으로는 감동이 부족합니다. 여기에 Non-GAAP 착시, 매출 성장 부진, 고금리로 인한 밸류에이션 압박이 겹치면 이익이 좋아도 주가는 미지근하거나 오히려 하락할 수 있습니다.
Q. GAAP EPS와 Non-GAAP EPS 중 어느 걸 봐야 하나요?
A. 두 가지를 모두 확인하되, 차이가 클수록 주의가 필요합니다. GAAP은 회계 원칙에 따른 공식 이익이고, Non-GAAP은 기업이 자의적으로 일부 비용을 제거한 숫자입니다. GAAP 기준 PER이 29배, Non-GAAP 기준 PER이 22배로 벌어질 정도라면 기업이 어떤 비용을 빼고 있는지 반드시 살펴야 합니다.
Q. AI 투자 관련 주식을 고를 때 뭘 먼저 봐야 하나요?
A. 영업 현금 흐름과 본업 영업이익을 먼저 확인하는 것을 권합니다. 비상장 AI 지분 평가 이익이나 감가상각 조정으로 부풀려진 이익은 언제든 반전될 수 있습니다. 실제 사업에서 현금이 들어오고 있는지, CAPEX 대비 이익 증가가 뒷받침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지금 시장에서 옥석 가리기의 시작점입니다.
Q. 금리가 오르면 왜 성장주가 더 많이 빠지나요?
A. 성장주는 미래의 이익이 주가의 핵심 근거인데, 금리가 오르면 미래 이익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는 할인율이 높아집니다. 할인율이 높아지면 같은 미래 이익도 현재 가치가 더 낮게 계산됩니다. 당장 이익이 많지 않고 먼 미래에 큰 이익을 기대하는 AI·성장주일수록 이 영향을 더 크게 받습니다.
결론
제가 추격 매수 실패를 복기하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건, 숫자가 좋아도 주가가 안 가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표면적인 EPS만 보던 습관에서 벗어나, Non-GAAP과 GAAP의 차이를 확인하고, 감가상각과 평가 이익이 얼마나 끼어 있는지, 영업 현금 흐름이 이익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보는 것이 지금 시장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에 10년물 국채 금리가 5%를 넘어 지속되는지 여부, 달러 강세가 계속되는지를 함께 모니터링해야 합니다. AI라는 거대한 테마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결국 현금 흐름과 실제 수익화로 증명되는 시간이 왔습니다. 지금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느냐'를 숫자로 보여주는 기업만이 살아남는 시장입니다.